내가 겪은 직장 성추행, 그땐 왜 말 못 했을까

나는 직장 내 성추행 피해자였다. 직장 생활을 4~5년 정도 했을 때였고, 새 회사로 이직하자마자 겪은 일이었다. 당시 나는 전에 다녔던 곳보다 규모도 크고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보다 내 딴에 좋은 곳이라 일에 대한 열정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때 다시 생각해도 소름 돋는 그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은 유부남이었고, 내 부서 팀장이었다. 나는 뭣도 모르고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 적응이 절실하던 시기에 그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았다. 업무에 관한 조언이었는데, 내가 먼저 구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큰 회사에 오니 그저 '이렇게 후배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선배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는 조언을 해주면서 처음에는 손을 잡거나 쓰다듬고는 했다. 나는 그조차도 불쾌했지만, 당시에는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일단 회사 내외부 평판이 좋았고, 내가 그에게 도움을 구한 이유도 주변에서 "그 선배가 후배를 잘 챙겨주니 상담을 해보라"는 조언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의 신체적인 접촉은 경계선을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나는 '내가 예민한 건가', '다른 뜻은 없는 게 아닐까', '괜히 이러지 마시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나만 이상해 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만, 분명한 건 그는 명백하게 의도적으로 신체적인 접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만나면 내 얼굴을 쓰다듬었고, 자주 내 귀를 만졌다. 엘리베이터에 둘이 타는 일이 있을 때는 내 엉덩이 위치에 자신의 중요 부위를 밀착시키기도 했다. 회식자리가 끝나면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이쯤 되니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회사에 입사했지만, 밤마다 눈물로 지새우며 퇴사를 고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일단 그를 최대한 피해 다녀보기로 했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약속이 있어 늦게 나가겠다며 1~2시간 늦게 퇴근해 보기도 하고, 회사 동기한테 회식 끝나고 같이 가자고 조르기도 했다.  모두 역부족이었다. 그는 퇴근을 위해 짐을 다 싸고 일어났다가도 내가 늦게 가겠다고 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나왔다. 부서 내 회사 동기와 후배들은 이 사실을 모두 알았지만, 팀장이 그냥 먼저 가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회사 내에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최악의 경우라도 퇴사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았던 터라 나름 마음의 빚도 있었고,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인데 밥줄을 끊어 놓고 두 발 뻗고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았다. 혹자는 그게 무슨 물에 빠진 사람이 다리 위에 사람을 걱정하는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땐 그냥 그랬다.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지만, 정신 상태는 그랬다. 

물론, 무엇보다 나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일하던 업계는 유난히 소문이 빠르고, 좁은 바닥이었다. 누가 나에게 너의 그 욕심이 너를 그런 상황에 빠트린 거라고 해도 사실할 말은 없다. 애초에 일이 어려우면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어야지, 뭘 어떻게 잘해보겠다고 팀장한테 조언을 구했냐고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냥 나 역시도 소문이 무서웠고, 그 바닥에서 성희롱 피해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다. 롱런 하고 싶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그렇게 지옥 같은 몇 개월이 지나고 나에게도 볕뜰날이 찾아왔다. 그가 부서 이동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 회사에서 살아남았고, 그 행복도 잠시였다. 그는 내가 그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내 부서로 다시 복귀했다. 그것도 팀장보다 더 높은 부장이라는 직급으로.

그의 부적절한 행위는 부서 복귀와 동시에 다시 시작됐다. 나는 그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사이좋은 직장 선후배였다. 그 사람조차도 이런 내 고충을 몰랐을 수 있다. 직장 내 나의 이런 상황을 아는 사람은 내 최측근들뿐이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이직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그 일이 터진 것이다. 

사건은 사내 직장인 익명게시판(블라인드)에서부터 시작됐다. 누군가 그와 내가 회식이 끝난 뒤 함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다"는 식의 글을 올렸고, 그 일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피해는 내가 가장 컸지만(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피해자도 여럿이었고 나랑 큰 관계가 없는데도 증언을 해주겠다는 다시 생각해도 정의로운 선배도 있었다. 반대로, 그 피해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봐 사실을 말하려는 데도 부서 후배에게 일단 너는 가만히 있으라고 조언하는 다른 부서장도 있었다.

일이 커지면서 결국 나는 사장실까지 불려 갔고, 그 자리에서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놨다. 사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그의 의도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은 아주 조용히 권고사직 처리됐다. 그렇게 나만의 길고 길었던 직장 내 사투는 마무리됐다. 

지금의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내가 후회되는 것은 그에게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 심각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선배, 요즘 이러면 성추행이에요"라고 말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그래도 계속된다면 "기분 나쁘니 하지 마세요", "정말 싫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어야 했다.

당연히 어떤 성추행, 성희롱 사건도 피해자 탓이 아니다. 다만, 한두살 더 먹고 나니 나도 내 자신을 방어하고, 지킬 담력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길어지진 않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갑자기 하하 씨가 정준하 씨 자녀 이름 지어줄 때 손가락질을 하면서 한 말이 생각 나는 밤이다. "정신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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