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 하나만 들어줘"...호구가 되지 않을 권리


"부탁 하나만 들어줘." 내가 정말 두려워 했던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거절이 어려웠다. 나 자체가 워낙 부탁하는 게 어려운 소심한 성격이라 그 사람이 나한테 부탁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망설였을지, 얼마나 힘들게 입을 열었을지가 머리 속에 그려져서 '그건 안될 것 같다'라는 말이 차마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조차도 어려운 일을 다 떠 안고는 부탁하는 상대방을 원망하기 일쑤였다.

그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크리스마스고 새해고, 한 해의 중요한 기념일마다 부서 당직은 내가 거의 도맡다 싶이 했다. 남들이 싫어하는 잡일이나 까다로운 업무는 나한테 몰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나라면 크리스마스에 당직 일정이 걸렸다고 바꿔달라는 부탁은 입밖에도 내기 어려울 말이었지만, 사정이 얼마나 어려우면 저럴까 싶어 바꿔주던 것이 거진 기념일에 일하는 게 상관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부서원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에게 부탁을 해오곤 했다.

문제는 내가 그 모든 부탁을 흔쾌히 들어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는 부탁을 들어준 뒤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그 자체로 뿌듯해할 만큼 착하지도, 쿨하지도 않았다. 상대가 내가 들어준 일을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불쾌하기도 했고, 나아가 다른 서운한 일이 생기면 더 크게 분노하기도 했다. 그 부탁을 감당하면서 찾아오는 스트레스로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날도 허다했다.

나는 그렇게 혼자 '인간 불신'에 빠졌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꼭 나를 힘들게 만드려고 존재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누가 협박하거나 강요한 것도 아닌데 혼자 호구가 되겠다고 자처해 놓고 다른 사람들만 원망한 것이다. 나는 상대도 모르는 사이 혼자 그 사람들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저 무리한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사실 생각보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나 해보지 뭐, 식으로 부탁했는데,  거절 당하면 그 사람이 상처와 무안으로 밤을 지새우리라는 걱정은 나만의 착각일 수 있다. 그 사람은 그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당연히 여력이 돼서 부탁을 들어줬겠거니 했을 뿐일지 모른다. 

호구가 되지 않을 의무와 권리는 나에게도 있다. 부탁은 부탁일뿐, 내가 끝까지 호의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마땅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자 부탁이나 제안부터 안 하는 사람은 없다. 내 안위는 내 자신이 챙겨줘야 한다. 

이제는 부탁을 받으면 일단 거절부터 한다. 사실 부탁의 대부분은 그들 스스로도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거나 내가 아니라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내가 흔쾌히, 좋은 마음으로, 나중에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정도의 일만 받기로 했다.

물론, 여전히 거절이 쉽지만은 않다. 거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 그동안의 역사와 함께 나눈 시간, 때로는 마음의 빚  때문에, 또 때로는 고마웠던 마음으로, 다른 한편에선 사적인 애정으로, 부탁이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과의 관계가 소중하다면, 내가 흔쾌히 해줄 수 없는 일이라면, 거부해야 한다. "저기, 나도 정말 미안한데.. 거절 하나만 할게."

댓글

가장 많이 본 글